자꾸 사라지는 기억, '첫 키스만 50번째'

원호섭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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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하와이 섬. 그 곳에서 사는 '헨리'는 어느날 '루시'를 보고 첫 눈에 반해 다가간다. 첫 날 '작업(?)'은 성공적이었다.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진 두 사람. 다음날 헨리는 지나가는 루시를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그런데 루시는 헨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반갑게 다가선 그를 밀쳐냈다. 루시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그것도 상당히 희귀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루시의 기억은 10월 13일, 기억상실증의 원인이 됐던 교통사고가 발생한 날로 돌아간다. 두 사람의 사랑, 과학은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2004년 미국에서 개봉해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가 최근 리메이크돼 개봉했다. 일본 감독과 배우들이 촬영한 영화지만 배경은 원작에서 등장한 하와이를 그대로 따랐다. 한국 영화사들도 올해 리메이크작을 촬영하겠다고 발표했을 정도로 잔잔한 사랑 이야기인 이 영화는 큰 인기를 누렸다.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사랑 이야기라 볼 수 있지만 첫 키스만 50번째 제작진은 영화를 찍기 전 실제 이 같은 사례가 있었는지 찾아본 적이 있다고 한다. 수 많은 의사들에게 기억 상실증에 대한 조언을 구하던 중 현실에서도 영화처럼 '24시간'을 주기로 기억이 리셋 되는 일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100시간, 한 달 등 기억이 리셋되는 주기는 다양했다. 



이처럼 기억이 빠르게 리셋되는 대표적인 영화로 '메멘토'를 꼽을 수 있다. 메멘토에는 충격으로 인해 새롭게 경험한 기억이 10~20분에 한 번씩 지워지는 수사관이 등장하는데, 역시 실제 이런 사례가 존재했다. 1953년 미국의 신경외과 의사 '스코빌'이 뇌전증을 앓고 있는 환자를 만났다. 이 환자는 7살에 자전거를 타다가 머리를 다쳤고, 9살부터 경련 증상이 나타났는데 16살부터는 증상이 심해졌다. 결국 뇌의 측두엽 일부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게 된다. 수술 후 뇌전증으로 인한 경련은 줄었지만 이상 행동이 나타났다. 그는 매일 보는 의료진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으며 자신을 처음부터 치료했던 담당 의사도 볼 때마다 누구냐고 물었다. 어떤 것도 새롭게 배울 수가 없었고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핸리 몰래슨'. 마치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특정 시간이 지나면 모든 기억이 리셋되는 것이다. 



현재 의학계에서는 기억 상실증이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측두엽과 해마에 손상이 일어났을 때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두통이 있을 때 손가락으로 자주 누르던 관자 놀이 근처 부위다.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즉 "내 이름이 뭐죠?"라고 묻는 기억 상실증을 '전향성 기억 상실증'이라 부르고 영화에서처럼 앞의 사건은 기억하는데 뒤에 발생하는 기억이 사라지는 병을 '후향성 기억 상실증'이라고 부른다.



루시의 경우 사고 이후 보낸 시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만큼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데 문제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이 부위를 담당하는 곳이 바로 측두엽과 해마다. 단기 기억 중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반복적인 학습을 한 기억은 장기 기억 형태로 저장이 돼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데 측두엽과 해마가 손상이 되면 이 같은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서 이전 기억만 남고, 새로운 기억은 쌓이지 않게 된다. 




첫 키스만 50번째 영화의 결말도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루시는 헨리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무의식'은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마치 수영을 배운 사람이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하더라도 수영을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 '제이슨 본'에서 등장하는 비밀요원 '제이슨 본'이 자신이 누구인지는 잊었지만 몸에 배어 있는 훈련 동작이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실제 많은 연구들은 특정 기억, 정보가 기억 상실증으로 인해 사라졌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우리 몸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내측두엽 손상으로 기억 상실증을 보이는 환자에게 단어 목록을 보여 주면서 외우라고 하고 한 시간 뒤 목록에 있던 단어들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의식적으로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목록에 있던 단어들의 글자 일부를 보여 주면서 나머지 글자를 아무 것이나 생각나는 대로 채워 넣게 하면 목록에서 봤던 단어를 채워 넣는 확률이 높다. 즉, 이전에 봤던 단어들이 의식적으로 접근 가능하지 않은 상태로 저장돼 있다가 기억을 꺼낼 때 무의식으로 나타난다는 얘기다. 따라서 루시는 의식적으로 헨리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매일 본 것과 다름 없으니 뇌 어딘가에 저장돼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억 상실증의 치료도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기억 상실증은 자발적으로 치료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 중에서는 뇌의 특정 부위를 전기로 자극한다거나 하는 기술들이 개발 되고 있는 상황이다. 메멘토의 실제 사례인 몰래슨이 사망한 뒤 그의 뇌는 2,400여 개 조각으로 나뉘어 과학자들에게 제공됐다. 이에 따라 단기, 장기 기억에 관한 많은 의학적 사실들이 밝혀졌지만 아직 이를 치료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다. 



최근에는 뇌에 있는 죽은 신경 세포도 일부 재생될 수 있다는 연구 성과들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김광수'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지난 6월 초, 세계 최초로 파킨슨 병 환자의 피부 세포를 도파민 신경 세포로 변형해 뇌에 이식하는 임상 치료에 성공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파킨슨 병은 뇌 속에서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을 전달하는 신경 세포가 죽기 때문인데, 이를 되살리는데 성공한 것과 같은 만큼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뇌 신경 세포는 기억력과도 관련이 있는 만큼 이 같은 연구가 발전된다면 기억 상실증 치료에도 적용될 수 있다. 



다만 아직 인류는 뇌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한 뇌 과학자는 "우리가 뇌에 대해서 1%나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라고 되묻기도 했다. 여전히 인류에게는 많은 연구개발(R&D)과 투자, 관심이 필요하다.




<첫 키스만 50번째>

감독 피터 시걸 출연 아담 샌들러, 드류 베리모어 개봉 2004.04.15


(포스터 클릭시 영화 소개 페이지로 이동)


본 칼럼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수입 및 배급:팝엔터테인먼트)에 있으며 출처는 네이버 영화 입니다.




| 글쓴이 매일경제 원호섭 기자 

E. wonc@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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